영국에 알랭 드 보통이 있다면 프랑스엔 미셸 투르니에가 있다. 투르니에의 글에서는 목가적인 풀냄새가 나고, 또 그것은 때론 신화처럼 신비롭기까지 하다. 에드워드 호퍼의 그림 속 역 대합실처럼 도시와 고독이 만나는 공간에 어울리는 자판기 커피가 드 보통이라면, 투르니에는 수십 년 묵은 나무들이 둘러싸고 있는 옛날 수도원 건물을 개조해서 만든 시골집에 어울리는 벽난로 같다. 카페인의 냉소에 중독된 나는 까다롭고 신경질적인 드 보통이 마냥 좋다가도 가끔은 아주 오래 묵은 와인을 따고 싶어지듯, 많이 배운 교장 선생님 같은 투르니에가 또 못내 그립다.
뒷모습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상상력이 필요하다. 상상력은 이성에 반하는 비합리적인 것들을 대표하지 않는다. 그것은 진실이 아닌 것이 아니라, 수많은 진실 중 한 가지 판본(version)이므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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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날 우리를 인천 공항에서 런던의 히드로 공항으로 날라주거나 혹은 브레송의 예리한 감식안을 내 방 의자에 앉아 한 권의 사진첩 속에서 확인할 수 있는 것은, 물론 과학의 힘이다. 과학이 비행기를 만들고 사진기를 만들었으니. 그러나 수많은 과학의 법칙들도 하나의 작은 가설에서 시작했다. 가설은 상상력이란 재료를 빚어 만든, 속이 꽉찬 만두 같은 것이다. 때로 비행기나 사진기 같은 과학에서 낭만을 느끼는 것은, 그 속에서 상상력이란 재료 맛이 '살짜쿵' 배어나기 때문이 아닐까. 우리는 이 책에서 미셸 투르니에가 자기만의 상상력으로 세운 가설을 읽는다. 그는 뒷모습이 앞모습보다 더 많은 것을 말해 준다고, 혹은 뒷모습이 바로 우리 자신, 이라고 말하는 것만 같다.
파도가 차가운 맥주 거품처럼 일렁이는 바다 한 가운데 두 남녀가 서 있다. 어쩐지 전체적으로 을씨년스러워 보이는 건 파도 때문일까, 아니면 두 사람의 드러난 맨살 때문일까. 남자는 허름해 뵈는 셔츠를 입고 검은 바지를 정강이께까지 걷어붙였다. 여자는 하얀 치마를 허벅지가 훤히 보이도록 들어올렸고 다소 품이 커 보이는 외투를 입고 있는데 펑퍼짐한 뒷모습이 꼭 임신이라도 한 것 같다. 바닷물에선 많은 사람들 앞에서 오줌을 지린 소년의 난감한 슬픔 냄새가 나는 듯하고, 두 사람의 드러나 종아리에는 자디잔 소름이 돋아나 있을 것만 같다. 이들의 뒷모습을 투르니에는 이렇게 읽는다.
| 저 남녀는 가난한 사람들이다, 틀림없다!/ 부자들이라면 아예 수영을 한다./ 수영하는 데 필요한 팬티도 수영복도/ 다 갖춰놓았다. 수영복의 표면적은 그걸 가진/ 사람의 재산에 반비례하는 법. 때문에/ 아주 큰 부자들은 아예 벌거벗고 헤엄친다./ 부자들은 물론 수영을 할 줄 알기에./ 가난한 사람들은 수줍다. 추위를 타고 겁이/ 많다. 그래서 세상의 첫날처럼,/ 세상의 마지막 날처럼, 아주 조금씩만 앞으로/ 나가본다. 남자는 양말을 신은 채, 여자는 치마를 약간/ 걷어 올리고. 그러나 이 즐거움과 정다움이 이 한때를/ 영원히 잊지 못할 순간으로 만들어 놓는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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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난한 사람들은 수줍다! 이 자명하고도 간결한 진실이라니. 투르니에의 상상력이 빚어내는 수많은 뒷모습에 대한 해석, 그것은 너무나 끈질기고 투철하여 진실성을 의심할 수 없게 만든다. 말로 그림을 그리는 화가. 상상력으로 사진을 찍는 포토그래퍼.
드 보통이 이미 역설한 바 있지만, 우리는 사진에 대해 안이한 태도를 취한다. 사진을 찍어 두면 자동적으로 나의 의견이나 태도가 결정된다고 믿는 것이다. 물론 퓰리처상 후보에 오를 만큼 강렬하고 인상적인 보도 사진들은 그 자체로 하나의 '주장'이기도 하다. 그러나 '똑딱이'를 척척 눌러 무심코 양산하는 사진들 중에서 대상에 대한 관심을 넘어 관점까지 표현하는 사진들이 몇 장이나 될까. 패밀리 레스토랑에서 먹은 음식을 찍은 사소한 사진 한 장에 제목이라도 붙여주면, 갑자기 애가 달라 보인다. 엄마 없는 '코찔찔이'에서 사랑받고 자라는 소공녀처럼 보인다고 할까? 거기다 한 문단 정도 단상까지 덧붙여주면 미셸 투르니에 부럽지 않은 나만의 세상 읽기가 된다.
위에서 인용한 투르니에의 묘사에 대응하는 사진(오른쪽)이다. 상상했던 것보다 시시할 수도 혹은 더 인상적일 수도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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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에는 여러 가지 뒷모습을 찍은 사진들과 함께 투르니에의 한 편의 시와도 같은 코멘트가 달려 있다. 투르니에의 글을 먼저 읽고 상상한 이미지를 옆 페이지의 사진과 비교해 보는 재미가 쏠쏠하다. 혹은 반대로 사진을 먼저 보고 자기 나름대로의 '말 그림'을 그려보고 난 후 투르니에의 글과 비교해 보는 것도 흥미롭다.
물론 미욱한 나의 짧은 생각은 노련한 투르니에의 글과 비교하는 것조차 미안할 정도로 소박했지만, 내가 보지 못한 것들이 무엇이었는지 확연히 알게 되었다는 점에서 나름의 소득이 있었다. 아래(책 속 밑줄 긋기에 있는 사진)는 또 다른 뒷모습 하나. 피터팬처럼 차려 입은 저 꼬마는 땅바닥을 보며 무슨 생각을 하고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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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오늘의 책을 리뷰하신 '피지'님은 수면의 과학을 보고 샬롯 갱스부르에게 미쳐 버린, 그런 나른한 눈빛을 갈망하는, 번역가의 탈을 쓴 유사 휴머니스트. 번역작가라 불릴 그 날을 꿈꾸지만, 지금은 그냥 삐약삐약 초보 번역가. <바른번역> 소속이며 네이버 까페 <골목>의 부운영자이다. http://blog.naver.com/cpbach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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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들이 당도하게 된 만년은 돌이킬 수 없는 유배지의 삶을 연상시킨다 - 책 속 밑줄 긋기 |
한 여자가 밟아가는 운명의 도정들을 말해주는 듯한 이 사진 속에는 왜 이토록 정겹고도 가차 없는 우수가 깃들어 있는 것일까? 약혼, 결혼, 과부의 삶…… 마치 해를 거듭할수록 '사막화' 현상 -환경론자들의 말처럼-으로 말미암아 여자 주변의 인간적인 풍경이 황폐해지고 있는 것만 같다. 많은 사람들의 경우 그들이 당도하게 된 만년은 돌이킬 수 없는 유배지의 삶을 연상시킨다.
내 생각에 이 작품의 힘은 거기서 우러나오는 이중의, 서로 모순된 인상에서 오는 것 같다. 우선, 어떤 유치한 꿈의 발현일 듯한 이 한심한 변장술의 서툶이 마음을 흔든다. 땅에 끌리는 플라타너스 잎사귀 드레스, 마로니에 잎사귀로 만든 예복, 그리고 또 걸음을 멈추고 선 저 포즈, 기다림. 무엇을? 아마도 이 변신이 불러올지도 모를 그 무슨 기적을. 그러나 동시에 놀라울 정도로 성공한 변장. 그 서툶과 비참한 몰골에도 불구하고 이 변장으로 인하여 이 축소형 여인은 분명 속이 빈 나무뿌리에서 튀어나온 존재. 나무들의 저 높은 잎새들로부터 툭 떨어진 숲의 지신地神이라 해서 믿을 만하지 않은가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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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랑스를 대표하는 최고의 작가, 미셸 투르니에(Michel Tournier) |
 | | 1924년 파리 출생. 파리 문과대학과 법과대학을 수학, 석사과정은 철학을 전공했다. 철학 교수가 되고자 했으나 자격 시험에 실패 후 번역과 방송국에서의 일을 하다가 출판사인 플롱사에서 문학부장직을 10년 동안 맡았던 경험이 계기가 되어 문학에 대한 깊은 관심을 갖게 되었다. 1967년 첫 소설 <방드르디 혹은 태평양의 끝>으로 아카데미 프랑세즈의 소설 대상을, 1970년 <마왕>으로 공쿠르상을 수상했다. 1972년에는 공쿠르상을 심사하는 아카데미 공쿠르 회원으로 추대, 프랑스 문단에서 대가로서의 확고한 위치를 획득했다. 현재 파리 근교의 한적한 마을 생 레미 슈브류즈의 사제관에서 홀로 살고 있다. | 외면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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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분하고 깔끔한 영상을 선사하는 사진작가, 에두아르 부바(Edouard Boubat) |
 | | 1923년 파리 출생. 제2차 세계대전 중 파리에 있는 에콜 에스티엔느에서 사진요판술을 공부한 것이 전부일 만큼 독학으로 사진술을 익혔다. 그럼에도 '아무런 일도 일어나지 않은 순간'을 예술로 승화하는 탁월한 능력이, 타인들에 대한 관심에 역점을 둔 전후의 미술 성향과 조화를 이루었다. 대상과의 친밀한 교감을 통해 피사체에 접근한 것으로 평가된다. 첫 전시회는 레프트 뱅크의 '라 윈' 서점에서 열렸다. 1947년에 코닥상을 수상했으며, 고급 예술지 <레알리테>와 오랫동안 협력한 다음 1967년부터 독립작가로 활동하면서 1977년 사진 축제 '아를르의 만남'을 기획하였고 1984년에는 사진 부문 국가대상을 수상했다. 1999년 파리에서 영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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