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7년 03월 14일
카메라 루시다를 읽고
권은영
책 제목: 카메라 루시다(Camera Lucida. 1980).
저자: 롤랑 바르트(Roland Barthes).
역자: 조광희& 한정식.
출판사: 열화당.
출판년도: 1986. 10. 6./1998. 6. 10.
책 가격: 3000원.(신판/6800원)
총분량: 125쪽/143쪽.
누군가 올린 글에서 보았던 문구가 기억난다. "내 대학시절을 관통했 던 것은 롤랑 바르트였다" 내게도 롤랑 바르뜨(Roland Barthes, 1915-80)는 정운영, 김승옥, 그리고 안치운과 함께 내 20대 전반을 결 정지었던 사람으로 기억된다.(발터 벤야민이 그랬던 것처럼..) 1991년 여름, 학교도서관에서 우연히 발견한 롤랑 바르트의 <카메라 루시다>. 그때 이 책은 우연히도 문학서적 코너에 꽂혀 있었다.
그때 는 소설을 주로 읽었기 때문에, '미술'이나 '사진'은 관심의 대상이 아 니었다. 그러나 이 책을 접하고 난 뒤에는 사진이 관심의 영역속으로 들어왔다. 그만큼 이 책에 깊이 매료되었기 때문이다. 사진에 내재된 내러티브가 내 안에 어떤 울림을 줄거라곤 생각하지 못했다. 내게 있어 사진은 단순히 화학적인 작용의 결과물이었고, 따라 서 별다른 의미를 획득하지 못하고 있었다. 지금 내게, 그런 생각들은 더 이상 유효하지 못하다. 아니, 바르트의 "카메라루시다"(Camera Lucida: 빛의 방)를 읽고 난 후부터 사진에 대 한 생각이 달라졌다고 하는 게 좀더 정직할 것이다. 이 책은 '사진에 관한 노트'라는 부제를 가지고 있다.
원제는 "밝은 방"(La chambre claire-Note sur la photographie)이지만, 카메라 루시 다란 제목으로 번역되어 나왔다. 책의 맨 앞 표지엔 '다니엘 부디네'(Daniel Boudinet)의 폴라로이드 (Polaroid, 1979.) 사진이 보이고, 몇장을 넘기니 "사르트르의 상상적인 것에 바침"이라는 오마주(homage)가 쓰여 있다.- 사실, 이 책은 실존 적, 현상학적 세계관으로 열림의 세계를 두드리고 있다. 그것은 바르트 의 미학적 건반이 세계와 반응해서 공명하는 울림들. 본문의 첫 페이지를 읽는다. "아주 오래전 어느날, 나는 우연히 나폴레옹의 막내 동생인 제롬 (Jerome, 1784-1860)의 사진 한 장을 보았다. 1852년에 찍은 것이었다.
그때 나는, 그 이후에도 결코 지워버릴 수 없는 놀라움과 함께, '나는 지금, 황제를 직접 보았던 두 눈을 보고 있다'고 말했다. 때때로 나는 이 놀라움에 관해 이야기 했지만, 아무도 그것에 공감하거나 이해하는 것 같지 않아 보였기 때문에(삶이란 이처럼 작은 고독의 상처들로 이 루어져 있다), 나 자신도 그것을 잊어 버렸다.
사진에 관한 나의 흥미 는 좀더 문화적인 윤곽을 띠었다."(11p.) "삶이란 이처럼 작은 고독의 상처들로 이루어졌다"(la vie est ainsi faites a coups de petites solitudes.)는 문장이 나를 찌른다.(+.#) "우선 나는 다음과 같은 사실을 발견했다. 사진이 재현시키는 무수한 것들은 단 한번밖에 일어나지 않았던 현상이다. 즉 사진은 실존적으로 다시는 되풀이될 수 없는 것을 기계적으로 재생시킨다. 사진에 찍혀 있는 사건은 결코 그 이외의 것을 향해 자신을 넘어서지 않는다. 사진 은 항상 내가 필요로 하는 표본을 내가 보고 있는 특정한 물체로 이끌 어 간다."(12p.) 여기 한 장의 사진이 있다.
그 사진 속엔 반팔 남방을 입고 웃고 있는 내가 있고, 강아지를 들고 웃고 있는 내 친구와 친구의 동생이 아랫도 리를 드러낸채 얼굴을 찡그리고 있다. 이 사진을 찍었을 때가 아마도 1978년 여름이었던 것 같다.(태양이 가쁜 숨을 몰아쉬던 기억이 난다) 이제 막 국민(초등)학교에 들어갔던 나는 학교라는 낯선 체계에 눈 뜨게 되었고, 올더스 헉슬리식으로 말 해, 놀라운 신세계에서 허둥대고 있었다. 그때 여덟 살이었던 나와 일곱살이었던 내 친구 "범형이", 그리고 세 살이었던 친구의 동생 "범석이". 지금 범석이는 군대에 가 있을만큼(백 혈병에 걸려서 군대에 가지 못했으며 지금 아파하고 있다) 자랐으며, 나와 내 친구는 스물 아홉과 스물 여덟의 언덕에 올라 서 있다. 이 사진 속의 나와 지금의 나 사이에는 약 20년의 시간의 강이 흐르 고 있다. 어떻게 해서 이 사진을 찍게 되었는지는 잘 기억나지 않지만, 그 사진을 찍은 장소는 알고 있다.
그 장소는 바로 외할머니집이었다. (지금 그곳엔 외할머니가 살고있지 않다) 롤랑 바르트식으로 말하자면 이 사진의 "푼크툼"(punctum)은 설명될 수 없는 그 무엇, 그리고 그건 사진 내부에서 튀어나와서 <나>를 찌 르는 것. 그것은 친구 동생의 벌거벗은 아랫도리와 역 브이자 모양의 발의 포즈에 있다. 이런 사소한 것들이 환유적으로 내게 다가오는 것. 그건 온전히 그 대상물에 추억이 있는 내게만 유호할 코드일 것이다. "스투디움"(studium)은 이 사진의 배경을 이루는 것, 그리고 나와 내 친구가 입고 있던 옷. 이런 것들의 정보라고 말할수 있다. "이 처럼 이 사진 저 사진을 살펴보는 동안(사실을 말하자면, 이 사진 들은 지금까지 모두가 공적인 것들이었다), 나는 아마도 내 자신의 욕 망이 어떻게 움직이고 있는가를 깨달았겠지만, 아직도 사진의 본질(그 리스어로 eidos)를 찾아내지는 못했다. 나의 기쁨은 불완전한 중재인었 음을 향락적주의적인 계획으니 축소된 주관성은 보편적인 것을 알아 볼수 없었음을 인정해야만 했다." "나는 사진의 증거, 사진을 바라보는 어떤 사람이라도 볼수 있는, 그 리고 그가 보기에 그것을 모든 다른 영상과 구별시켜 주는 이 사물을 찾아내기 위해서, 내 자신속으로 더 깊이 내려가야만 했다. 나는 나의 개영시(먼저 썼던 시를 취소하는 시-역주)를 써야만 했다."(61-63p.) 바르트는 "이미지의 수사학에서"(Rh torique de l'image) 이미지라는 단어의 기원을 이미타리(imitari)에서 찾았다. 그건 미메시스(mimesis) 와 교차하는 지점의 언어. 사실, 라틴어 "이마고"(imago)는 재현적 유 사성의 현상적 의미를 말한다. 그건 '레지스 드브레'(R gis Dever s)의 말대로 유령같은 이미지이고, 또한 이미지는 하나의 마술이다. "사진은 과거를 회상시키지 않는다.(사진에는 프루스트적인 것이 없 다) 사진이 나에게 일으키는 효과는 사라진 것(시간에 의해, 거리에 의 해)을 되돌려 주는 것이 아니라, 내가 지금 보고 있는 것이 참으로 존 재했음을 증언하는 데에 있다.
그런데, 이것은 정확히 수치스러운 효과 이게 한다." "언제나 사진은 무한히 지속되고 새로워지는 놀라움, 이 고집스러움 은 나를 형성시킨 종교적 실체 속으로 스며드는 모양이다. 그러므로 나는 어찌할 수가 없다. 사진은 부활과 관계되는 무엇인가를 지니고 있다. 우리는 비잔틴 사람들이 토리노의 성해포(성해포)에 배어든 예수 의 모습에 관해서 말하는 것, 즉 그것에 결코 인간의 손에 의해 만들 어지지 않았음(acheiropoietos)을 사진에 관해서도 말할 수 있지 않을 까."(84p.) 바르트는 '발터 벤야민'(Walter Benjamin)이 30년대에 사진에 관해 썼 던 바로 그 의미. 그러니까 "중요한 건 사진이 예술이냐, 아니냐가 아 니라, 사진이 발명됨으로서 예술계 전반의 흐름이 바뀔수 있다는 점이 다"의 언술적 가치들을 이 책에서 되살리고 있다. "내가 어떤 사진들에 관해 품은 애착에 대해 자문했을 때(이미 오래 전의 일이지만, 이 책의 처음에), 나는 문화적 흥미의 영역(스투디움)과 때때로 이 영역을 가로질러 찾아오는 그리고 내가 푼크툼이라고 부른, 얼룩말 같은 어떤 줄무뉘를 구분할 수 있으리라고 믿었다.
나는 이제 '세부'와는 다른 푼크툼(또다른 상처자국)이 존재함을 알고 있다. 이미 형태는 없지만 강도를 지닌 새로운 푼크툼, 그것이 바로 시간이며, 노 에마(Noema: 그것은-존재-했음)의 애절한 강조법, 순수한 표상이 다."(95p.) 해체의 철학자 '자크 데리다'(Jacque Derrida)는 "프시케, 타자의 발 견"(Psyche: inventions de l'autre. 1987)이란 책에서 "푼크툼이라는 미 묘한 장외, 그 코드 밖은 언제나 코드화되어 있는 영역으로서의 스투 디움과 타협하고 있다. 푼크툼은 스투디움에 속하지 않으면서 속하고, 그 안에 위치시킬 수 없으며, 스투디움의 틀지워진 공간이 지닌 동질 적 갠관성 속에 결코 기입되지 않는다. 그러나 푼크툼은 스투디움에 거주하며, 그렇다기 보다는 거기에 출몰한다."라고 이야기하고 있다. 아트리지(D. Attridge)는 "무딘의미는 너무 넓고 둔간적이어서 서사적 재현을 거부한다면, 스투디움(studium)에 대비되는 푼크툼은 너무 좁 고 뽀족하기 때문에 서사적 규칙을 빠져나온다"고 말하고 있다. 바르트에 의하면 사진은 약호없는 메시지로 지칭된다. 그리고 이렇게 고백한다. "유령이 거처하는 곳은 푼크툼(punctum)이다. 나는 사진의 깊이를 파고들어갈 수도, 그것을 꿰뚫어볼 수도 없다는 사실이 그것이 다. 마치 흔들림없는 수면처럼, 나의 시선으로 스쳐갈 수밖에 없다." 또한 바르트는 이 책에서 '어머니의 온실사진'을 통해 시간성과 푼크 틈 그리고 스투디움이 동시에 다가오는 것에 대해 이야기 한다. 바르 트의 언어는 차분하게 다가온다. 독자는 바르트의 언어가 함유하고 있 는 대상성이 어떻게 사진의 '노에마'(noema)를 설명하는지 조금씩 알 게 된다.(스투디움은 결국 언제나 기호화되지만, 푼크툼은 그렇지 않다 고 말한다) 그는 빠른 호흡으로 성큼성큼~ 앞으로 나아가기 전에, 넉넉한 호흡으 로 독자의 시각을 이끌어 내고 있다. 사실, 롤랑 바르트의 이 책은 "사 랑의 단상"(Fragments d'un discours amoureux, 1977)과 함께 바르트 의 저작중에서는 읽기가 별로 어렵지 않다는 미덕을 가지고 있다.(이 미덕은 대단히 중요한 미덕이다: 바르트는 여기에 동의하지 않겠지만) 이 책은 롤랑 바르트가 쓴 마지막 저작이다. 이 책은 바르트가 교통 사고(1980년 2월) 후, 절단수술을 거부함으로서 결국 자살에 가까운 죽 음을 맞이한 후, 출간된 저서이다. 그리고 무엇보다 이 책은 내가 바르트에 대해 최초로 알게 해준 책이 다. 그래서 "카메라 루시다"는 바르트대한 출발점이자 귀결점으로 작용 하고 있다. 그것은 내 안에서 의미의 파동을 만들어내고 있다.(의미의 그물망을 잽싸게 낚아채는 키리코) 우리의 바르트는-프랑스 지식인들의 꿈-"꼴레주 드 프랑스"(Col ge de France)의 교수였으며, 열광적인 팬들에 둘러싸인 행복한 삶을 살 았던 작가이다.
뿐만 아니라 기호학자, 문학비평가로서도 상당히 인정 받았으며, 어떤 이는 "사르트르"(Jean Paul Sartre) 이후, 프랑스 최고 의 지성으로까지 말하고 있다.(프랑스 이외의 지역에서도) 특히 미국 문학비평계에까지 영향력을 미쳤다. 바르트는 구조주의적인 비평을 문학비평에 적용시킨 최초의 문학비평 가로 인정받고 있으며 또한 "저자의 죽음"이란 함축적인 문학관으로 유명하며, 작가가 아닌 독자의 줄거움에 커다란 무게를 두었다. (그러 나 이 즐거움은 우리가 일반적으로 알고 있는 그런 줄거움하곤 다르 다) 행위자 중심이 아닌, 관객 중심의 문학세계를 주장하는 바르트에게 당대의 시선이 집중되었고, 또 비판도 많이 받았다. 1965년에 소르본대학의 불문학교수로 있던 "레이몽 피카르"(Raymond Picard)의 '새로운 비평이냐, 새로운 사기냐?'(Nouvelle critique ou nouvelle imposture?)는 바르트에 대한 최초의 묵직한 비판이었다. 물 론 이 비판의 논점은 언어의 투명성에 관한 것이다.(이 논쟁은 무명의 바르트를 일약 논쟁의 중심으로 이끌었다.) 바르트는 다양한 모습을 한 인간으로 비추어진다. 스스로의 이론을 부정하는 행동을 즐겨했으며 끊임없이 카멜레온처럼 변신에 능했다. 그는 모순과 모순 사이를 잘 조절하는 재주를 가졌으며 스타기질이 농 후했던 인물이다. 그리고 "줄리아 크리스테바"(Julia Kristeva, 1941-) 같은 사람을 자기사람으로 키우는 선구안도 갖추고 있었다. 이 책의 날개에 실려 있는 "롤랑 바르트"의 사진을 바라보고 있다. 오 른 손가락에 담배를 끼우고 있는 바르트가 올빽을 하고서 나를 바라보 고 있다. 은발이 빛나고 있다.(흑백사진이다) 남방에 니트를 입고 있는 바르트의 고개가 카메라를 향해 비스듬이 돌아 서 있다. 그의 시선은 카메라 앞에 그가 존재했음을 말하고 있다. 그러나 바르트는 이미 존재하지 않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진 속 의 바르트는 그 자신의 언어처럼 내 의식 속에 숨쉬고 있다. 그건 존 재하지 않되 존재하는 그런 상태, 혹은 존재하지만 존재하지 않는 그 런 상태로 환원된다. 그래. 다만 바르트는 "거기 있었음"(l'avoir- t -l )의 시제 속에서만 나타난다. 갑자기 푼크툼이 내부로 찔러 들어온다. 헉~.. 허걱~~ 바둥바 둥~ (-_-+) 꼬르르륵.. 120여 페이지의 작은 분량이지만, 이 책은 수잔 손탁(Suzan Sontag) 발터 벤야민(Walter Benjamin)의 저서들과 함께 사진학의 중심적인 책 으로 꼽히고 있다. 번역도 좋고, 도판들도 풍부하다. 알프레드 스티글 리츠(Alfred Stieglitz), 아우구스트 잔더(August Sander), 루이스 하인 (Lewis H. Hine) 등의 수준 높은 사진들을 맛 볼 수 있어 더욱 좋은 책이다. 바르트의 또 다른 저서인 '롤랑바르트에 의한 롤랑바르트'(Roland Barthes par Roland Bartehs, seuil. 1975)에서 그가 던진 질문인 "무엇 을 뜻하는가"(Qu'est-ce que c'est?)보다, 그것은 "내게 있어 무엇을 의미하는가"(Qu'est-ce que c'est pour moi?)라는 목소리는 여전히 유효한 것이고, 또한 그것은 이 책의 관점을 말해주기도 한다.
# by 물안경 | 2007/03/14 18:34 | 책 읽는 마을: 서평 모음 | 트랙백 | 덧글(0)